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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래를 기대하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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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기대하라 (신34:9-12)
오늘의 말씀은 '미래를 기대하라'입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합하여 시간이라고 합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 미래는 다가올 시간. 이 두 시간 사이에 현재가 있습니다. 이 시간들은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이 아닌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일어난 사건 자체는 변경시킬 수 없지만, 보는 관점은 오늘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나무에 나이테가 생기듯 우리에게도 많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기억도 있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습니다. 인생의 불행은 기억해야 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야 될 것은 새록새록 생각나서, 현재를 아프게 하고 미래의 길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분리되었을 때는 삶의 방향성을 잃게 됩니다. 분리된 세 점이 연결될 때 선이 되고, 방향이 생깁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점은 현재입니다. '어떤 과거를 기억할 것이며', '어떤 미래를 기대할 것인가'는 '현재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고민은 선택에 있습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의 팡세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유작인 ‘팡세’란 책이 있습니다. '팡세'란 불어로 ‘생각’이란 뜻입니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글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의인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인간은 약한 갈대와 같지만, 생각할 수 있기에 위대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사는데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동물도 생각을 하는데 현실 중심으로만 생각합니다. 현실 중심의 생각이란 사는데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현실을 넘어서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Vision, 꿈, 상상력 등이라고 합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먼저 누군가의 생각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장대 높이뛰기 선수들은 마음으로 장대를 넘지 않으면, 결코 넘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앞에 인생의 장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으로 장애물을 넘어야지, 현실의 장애물을 넘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 3 종류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 나옵니다. “내일 결혼식을 앞둔 사람, 내일 장례식을 앞둔 사람,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이 중에 누가 오늘을 가장 행복하게 살겠는가?” 물론 내일 결혼을 앞둔 사람입니다. 우리의 미래관이 오늘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오늘 우리가 절망하는 진짜 이유는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살이란 죽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살고는 싶지만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내일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란 것도 아십니까? 그러나 내일은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오늘 아무리 힘들더라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종말론
미래란 시간은 인간에게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줍니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현재보다 나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기독교에는 종말론이 있습니다. 종말론(eschatology)은 희랍어에서 온 말로, 마지막 때에 일어날 현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야훼의 날, 주의 날, 심판의 날 등의 종말론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입니다. 종말을 향하여 계속 질주하고 있습니다. 종말은 양날을 가진 칼과 같습니다. 한쪽은 심판의 날, 다른 쪽은 구원의 날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그날 그곳에서의 삶을, 오늘 이곳에서 사는 삶입니다.
세상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중심으로 3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둘째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세째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 첫 번째 사람을 무신론자(Atheist라고 합니다. 세상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세상 중심으로 살다가 세상과 함께 생을 마치는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 중심이고 물질 중심입니다. 유물론이란 물질이 모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불가지론자(Agnostics)입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회색 지대에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 것은 아닌데, 믿지 않으려니 뭔가 찜찜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사람은 유신론자(Theist)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빌3:20) 이 땅에서 눈을 감을 때 천국에서 눈을 뜰 것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지막 날 부활을 믿고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천국에 가면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너는 무슨 자격으로 천국에 들어 오려고 하느냐?”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자격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자격으로 들어갑니다.” 따지고 보면 구원도 성결도 천국도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된 줄 알고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약속에 근거한 기대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기대란 막연한 단어가 아닙니다. 기대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언약으로 맺어진 ‘언약 백성’입니다. 성서를 영어로 ‘Covenant, Testament’라고 하는데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의 기대’도 말씀이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의 애굽 생활을 청산하고, 광야의 길을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신34:4)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가나안 입구까지 입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대권을 넘겨 주었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34:9) 모세는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땅의 사명을 다 마쳤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역으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은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가면서
지난 화요일 NSW 주 상원의원인 프레드 나일 목사 내외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부인인 Silvana가 우리 교회를 향하여 ‘예언적 축복’을 했습니다. “너희 교회는 부흥할 것이다. 계속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것이고 250명, 500명, 1000명까지도 모일 수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250명은 어떻게 가능하겠지만 500, 1000명은..... 일단 그녀의 예언적 축복을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사실 이번 주 설교 제목이 미래를 기대하라입니다.”라고 말하니, 이제는 Silvana가 놀라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예언적 축복하는데, 지금 네 이야기를 들으니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라며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그날의 일련의 만남이 모두 Vision과 관련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북한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 북한을 향한 Vision을 들었고, 오후에는 '호주 개척자 마을’(Australiana Pioneer Village)을 방문하여 불모지를 꿈으로 일궈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프레드 나일 목사님을 만나 우리 교회를 향한 ‘예언적 축복’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출애굽 2세대에게 모세의 유언과 같은 3번의 설교입니다. 지난 3주 동안 신명기의 말씀을 의지하여 ‘과거를 기억하라’,‘현재를 교육하라’, ‘미래를 기대하라’는 제목으로 피차간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라는 것은 ‘너희를 출애굽 시킨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되셔서 여기까지 인도했다는 사실을 늦기 전에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현재를 교육하라’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시로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미래를 기대하라’는 것은 우리의 앞길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창22:24)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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