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 1829-1912)
모든 인생에는 전환점(Turing Point)이 있다. 전환이란 방향이 바뀐다는 뜻이다. 마치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큰 바위를 만나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물줄기를 바꾸는 것과 같다. 당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 사건은 무엇인가? 결혼일 수도 있다. 이민일 수도 있다. 직업일 수도 있다. 오늘은 구세군의 창립자인 윌리암 부스가 어떤 계기로 구세군을 창립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출생 (Birth, 1829년 4월 10일)
윌리암 부스는 1829년 영국 중부에 위치한 ‘노팅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아주 가난했다. 학비가 없어 그는 13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전당포 견습원으로 일해야 했다. 그 다음해인 1943년 그의 아버지인 사무엘 부스까지 돌아가셨다. 노팅햄에 가면 그가 세례를 받은 성공회 교회가 있다. 그는 태어나고 2틀만인 4월 12일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곳에 가서 그의 세례기록부를 보았다. 아버지 사무엘 부스는 특별한 직업이 없었는지 ‘Gentlemen’ 이라고 적혀 있었다.
회심 (Conversion, 1845년)
그는 노팅햄에 있는 감리교회에 다녔다. 그는 그곳에서 회심을 했다. 지금은 극장으로 변해 있었다. 입구에는 윌리암 부스가 ‘다녔던 교회’라는 표지가 있었다. 그가 회개한 날 이런 고백을 했다. “그 날 밤 즉 행복한 변화를 이룰 때, 그때는 약 11시경이 되었는데, 그때 이후로 내 삶의 업무는 거룩한 성품을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랑의 활력으로 사는 것이었다. 나는 참된 종교란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돕는 것, 즉 사람들을 주의 군사가 되게 하고 죽음 앞에서 신실하게 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구세군의 표어인 ‘Saved to Save’는 이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결혼 (Marriage, 1855년)
1855년에 케더린 머포드를 만나 그녀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강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12살 때에성서를 8번 읽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후에 그녀는 성서를 근거로 당시에 금지 되었던 여성의 설교권을 주장하게 된다.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굴하지 않고, ‘Female Teaching'을 쓴 후 1860년 대중 사역을 시작했다. 이러한 정신이 구세군에서 남녀가 동등하게 안수를 받고 사역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구세군 창립자는 캐더린과 윌리암 부스라고 한다. 당시 사역에 있어서도 윌리암 부스가 할렘가인 동부 런던에서 사역을 할 때, 캐더린 부스는 부촌인 서부 런던에서 설교를 하여 윌리암 부스의 사역을 돕기도 했다.
그녀로 인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목회사역에 집중했다. 그리하여 그는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1861년에 교회 지도자들이 그의 순회구역을 제한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곧 그곳을 뛰쳐나와 소속이 없는 ‘자유 전도자’가 되었다. 케더린 부스는 남편의 우군이자, 동시에 건설적인 비판가가 되었다. 그녀는 지혜를 발휘하여 구세군이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사명 (Destiny, 1865년)
그는 감리교를 탈퇴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순회 전도자로 극도의 가난한 생활을 하다, 1865년 캐더린 부스의 부모님이 사는 런던으로 갔다. 그곳에서 윌리암은 동부런던을 중심으로, 캐더린은 서부런던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 가난 사람과 노동자들의 부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흥(Revival)’ 잡지 편집인인 R.C. Morgan과 Samuel Chase는 1865년 7월 2일 주일 집회에 윌리암 부스를 초청했다. 집회 장소는 퀘이커 교도들의 묘지가 있는 정말 이상한 곳의 텐트 속에서 열렸다. 그때 윌리암 부스 자신도 이날이 후에 구세군이 창립될 날이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윌리암 부스는 집도 서부런던에서 동부런던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어느 날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윌리암은 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O Kate, I have found my destiny! There are the people for whose salvation I have been longing all these years. As I passed by the doors of the flaming gin-palaces tonight I seemed to hear a voice sounding in my ears, ‘where can you go and find such heathen as these, and where is there so great a need for your labors?’ And there and then in my soul I offered myself and you and the children up to this great work. Those people shall be our people, and they shall I have our God for their God.
“오 케이트, 나는 나의 사명을 발견 했다오. 오랫동안 구원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소. 내가 불빛이 환하게 빛나는 문들 지날 갈 때, 내 귀에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소. “너는 어디를 가서 이렇게 많은 이교도들을 만날 수 있겠니, 이곳이 너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겠니?” 그때 그곳에서 마음속으로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이 위대한 일에 드리기로 했소. 이 사람들이 우리 사람이고, 우리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 이야기를 들은 캐더린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그녀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I remember the emotion that this produced in my soul. I sat gazing into the fire, and the Devil whispered to me, “this means another departure, another start in life” The question of our support constituted a serious difficulty. Hitherto we had been able to meet our expenses out of the collections which we had made from our more respectable audiences. But it was impossible to suppose that we could do so among the poverty-stricken East Enders – we were afraid even to ask for a collection in such a locality. Nevertheless, I did not answer discouragingly. After a momentary pause for thought and prayer, I replied, “wee, if you feel you out to stay, stay. We have trusted the Lord once for our support, and we can trust Him again.”
“그날 나의 심중에 생긴 감정들을 기억합니다. 나는 불빛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고, 사탄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곳으로 떠나 새롭게 또 다른 시작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줄 잘 알잖아.”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큰 문제였다. 지금은 존경 받는 교인들의 헌금을 통하여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 동부 런던 사람에게서 불가능하고, 그런 곳에서는 헌금도 걷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생각과 기도를 한 후에 나는 힘있게 대답했다. “음, 당신이 머물러야 한다면 머무르세요. 이번에도 하나님이 도울 것이고, 우리는 그분을 다시 한번 믿어봐요.”
그는 새로운 단체를 세울 계획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직 영혼 구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집회에서 구원 받은 사람을 인근 교회로 보냈다. 하지만 세가지 큰 장애가 있었다. 첫째 저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고, 둘째 교회가 저들을 원치 않았으며, 셋째 사역을 위해서 얼마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세군은 거리에서 태어난 단체라고 부른다.
구세군의 이름은 할렘가인 동부런던에서 ‘동부런던 부흥협회’로 시작하였으나 그 사역이 점점 확대 됨에 따라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 넘게 되자 ‘기독교 선교회’로 바꾸었다. 그러다 1878년에는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878년 윌리암 부스에게 선교 보고를 하던 Railton 부장은 ‘기독교 선교회’는 ‘자원군’(Volunteer Army)라는 표현을 썼다. 이 보고서를 본 윌리암 부스는 “왜 우리가 자원군이냐, 우리는 Salvation Army이다.”라고 했다. 이후로 구세군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구원군’이라고 해야 한다. Salvation Army는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 왔다. 일본에서 Salvation Army는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의미로 ‘救世軍’이라 번역했다. “동부런던 부흥협회(East London Revival Society, 1865) - 동부런던 기독교 선교회(East London Christian Mission) - 기독교 선교회(Christian Mission) - 구세군(The Salvation Army, 1878)”
1879년에 구세군은 81개의 선교현장에 127명의 전담 복음전도자들을 배치하였고 구세군 악대를 조직하여 행진곡을 부르면서 전도하였다. 당시에 유행하던 곡은 부스가 지은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등이 있었다. 1880년에는 제복을 입게 되었고, 1878년에는 "구세군 군령군율"을 발간했다.
죽음 (Promoted to Glory, 1912년 8월 10일)
1912년 8월 12일 그는 검을 내려 놓았다. 하나님이 맡긴 모든 사명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장례식 행렬에는 약 15만 군중이 런던의 거리로 몰려 나왔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자리였다. 특별히 왕은 친필로 “미래에 우리는 그가 친구들을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온 세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나도 그들과 함께 한다.”라고 썼다. 여왕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라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그의 사역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 옆에는 특별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앉았다. 그녀는 과거 매춘부였는데, 구세군을 통해서 구원 받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1904년에 ‘윌리암 부스’는 ‘에드워드 7세’의 초청을 받아 ‘버킹험궁전’에 갔었다. 그는 그곳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예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물질에 있다.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 영혼에 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몇 달 전인 1912년 5월 9일 런던의 ‘로얄 알버트홀’에서의 마지막 설교는 아직도 우리의 귀에 쟁쟁하다. “지금과 같이 우는 여성이 있는 한 나는 싸우리라, 굶주린 어린이들이 거리에 있는 한, 나는 싸우리라, 남자들이 감옥소를 드나 드는 한, 나는 싸우리라, 거리에 가난한 소녀가 방황하고 있는 한, 나는 싸우리라. 하나님의 빛이 없이 한 영혼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싸우리라, 끝까지 싸우리라.”
While women weep, as they do now, I'll fight; while little children go hungry as they do now, I'll fight; while men go to prison in and out and in and out, I'll fight; while there is a poor lost girl upon the streets, I'll fight; while there yet remains one dark soul without the light of God, I'll fight-I'll fight to the very end!
***이 글은 호주 다문화사역담당 김환기사관님이 작성한 글로서 <성민의 요람>카페에서 퍼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