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순종 이야기(새가정 기고)
나의 순종 이야기
하나, 성도들의 인생이야기에 공감하기
나는 26살적부터 시골교회에서 사모님 소리 들으며 어른 역할을 해왔다. 첫 임지인 충북 영동 서금영문에 부임하여 이듬해 큰 아들 현태를 낳고 3년 터울로 둘째 아들 은태를 낳았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여성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지만, 구세군 여사관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무조건 인내해라. 입을 꾹 다물어라. 섬기기를 다하라. 왜 이렇게 내 마음 속에 각인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렸을 적부터 보아 온 여사관님들의 이미지가 은연중에 내 앞으로의 여사관상을 세우는데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러한 생각만 가지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참고 인내하며 목회하며 살아 온지가 벌써 26년이 되었다.
부임해서 가는 교회마다 내가 섬긴 것 보다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컸지만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적은 생활비로 살림을 꾸려가기도 힘들었다. 남편의 공부 뒷바라지에 아이들 양육까지 심신이 고달팠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두 아들은 어려서 잔병치레가 많아 애간장을 녹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세군 사관의 힘은 청빈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감사하며 극복해 나갔다.
바람불면 쓰러질 것 같다는 가냘픈 몸매로 남편이 대전으로 공부하러 간 사이 아이를 유모차에 싣고 성도들이 있는 밭으로 나가 뙤약볕 아래 함께 있었고, 턱턱 숨이 차오르는 비닐하우스에도함께 있었다. 일도 거들어 주지 못하면서 노련하지 못한 어린 사모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냥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좋은 이야기엔 웃음을 지어 주고 슬픈 이야기엔 함께 마음아파하며 공감해주는 것이었을 테지.
큰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 쯤, 정교님 과수원에 가서 사과를 따기도 하고 빨간 사과되라고 파란 쪽을 해가 쪼이도록 놔주는 작업을 하였다. 사과꼭지가 다른 사과에 흠집을 낼까봐 가위로 꼭지를 따 주는 일도 거들곤 하였다. 말이 일이지 사과향기 맡으며 노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엄마가 할 줄 모르는 일이지만 성심껏 돕고 있으면 아이는 아이대로 과수원을 뛰어 다니며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심심하지 않게 웃음을 선사해 주면서 사과를 가지고 놀았다.
마침 지나가는 소금장수 차 스피커에서 소리가 났다.
"소금사려~~"
우리 아들도 따라서 했다.
"소금사려~~"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웃었지만 나는 내 아들이 소금장수 흉내 내는 것이 싫었다. 지금 그 아이가
자라 26살이 되었으니 참으로 오래된 옛날이야기이다.
우리 큰 아이는 교회 아랫집 부교님을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따랐다 . 젖을 뗀 후, 경기를 자주하던 아이를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내 대신 업고 뛰시던 그 사랑, 신생아 때 눈물 구멍이 막혀서 눈물 구멍을 뚫어 주는 치료에 자지러지게 울던 작은 아이를 안고 얼마나 마음 아파했던가. 이제는 그 두 놈이 어엿한 장정이 되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마을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동네를 놀이터 삼아 온종일 뛰놀던 우리 두 아들. 책을 그렇게 좋아해도 변변한 동화책하나 사주지 못했지만 마을 어르신 모두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선생님이 되어 주셨다.
둘, 두 이이들의 인생에 순종하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인지 질풍노도의 청소년시기를 무탈하게 잘 보냈다. 우리 부부는 몇 가지 규칙을 세워 놓은 것 외에는 별 간섭을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시청을 초등학교 때까지는 9시 뉴스 직전까지로 했다. 중학교 때 귀가 시간이 9시였고, 고등학교 때는 밤 10시로 하였다. 학교에서 시키는 자율학습 때문에 지킬 수 없었지만 다른 이유로는 그 시간은 꼭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을 제일 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사관자식이기 전에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철부지들이건만 성도들은 기대하는 바가 크다. 약간의 그런 부담감을 가지고 청소년 시절을 지냈을 우리 아이들이지만 원칙과 자율 속에서 엄마와의 줄다리기를 너무 팽팽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긴장감을 잘 유지하였다.
멋을 내기 시작한 두 아들을 위하여 방학이 되면 염색약을 준비하였다. 그 당시에는 머리에 노랗고 파랗게 염색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그 마음을 읽었고 학기 중에는 엄두를 낼 수 없으니까 방학을 이용하게 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날 쯤에 학교 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다시 검게 염색을 직접해주었다. 내 마음으로는 마땅치 않은 구석도 있었지만 엄마가 직접 해주니까 더 화려한 염색을 막을 수 있었다.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매우 염려스럽게 걱정해주었다.
“ 사관님 얼마나 속상하세요?”
우리 아들이 매우 불량끼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때 내가 “ 제가 직접 해주었는걸요.” 하면 매우 놀라는 눈치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였고, 어떤 원칙 안에서 허용할 것은 허용해 주며 살았다. 해결방법을 가르쳐 주는 똑똑한 상담자는 아니어도 들어주고 공감해주었다. 그런 와중에 부딪치는 일이 왜 없었겠는가. 내 자식이라고 그들의 생각까지 내 맘대로 할 수 는 없다. 내 생각과 다를 때마다 의견 충돌을 막기 위하여 내 주장을 절제하였다.
자기들이 길을 찾아 나가는데 도움이 되도록 내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정도였으나 두 아들이 가장 힘들 때는 엄마를 찾아 털어 놓는다. 나는 또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공감이 안 될 때는 되는 척이라도 하면서 위로하였다.
사실 나는 허점이 많은 엄마다. 아이들이 가진 능력보다 더한 능력을 요구하지 않은 것 외에는...
이것이 두 아들에 대한 순종이라면 순종일까?